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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야책_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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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이넝쿨책 기행기 심재빈 2019년 7월. 나는 회사를 그만뒀다. 그 후 몇 주를 집에서 꼼작하지 않았다. 보고 싶던 영화와 드라마를 몰아서 보고, 배달 음식과 편의점 군것질로 끼니를 때웠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잤다. 이불 속은 포근했다. 인스턴트 음식은 감미로웠다. 회사 생활로 탈진한 몸은 그동안의 숨 가쁜 패턴을 잊고 나태와 게으름이라는 수분을 솜처럼 빨아들였다. 이날도 특별할 게 없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기 전까진. 언제나 나를 '꽤 괜찮은 남자'로 비춰주곤 했던 거울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낯선 이가 거울 속에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공을 원했고 사회 관례에 따라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었다. 회사원이 되어 믹스커피 타는 법, 복합기 사용법, 소맥 마는 법, 야근 ..
캠핑의 시즌이다 허광석 청명한 하늘, 상쾌한 날씨, 울긋불긋 물든 단풍들이 펼쳐지는 자연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정말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족의 캠핑 이야기를 해볼까한다. 그동안 가까운 공원에 나들이만 다니다가 캠핑의자를 사고 친구 따라 몇 번 캠핑을 다녔다. 그러다가 큰마음을 먹고 캠핑용품을 장만하여 들뜬 맘으로 캠핑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시작을 하고 보니 모든 초보가 그러하듯 모든 것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얼마나 무지한 채로 캠핑을 시작했는고 하니, 첫 캠핑 날짜를 한여름, 그것도 8월 중순 여름휴가 기간으로 잡았던 것이다. 작년 여름,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캠핑이 시작되었다. 캠핑 장소는 해수욕장. 4시간 정도 차를 타고 도착한 해수욕장의 ..
칭따오를 찾아서 채종현 “칭따오 맥주 먹고 싶다.” 단순히 그 이유였다. 텔레비전에서 ‘양꼬치엔 칭따오 가고’ 하는 맥주 광고를 보다가 칭따오 맥주가 먹고 싶어졌고, 아내와 나의 청도 행은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됐다. 비행기와 호텔을 알아보는 과정도 인터넷으로 하루 만에 오케이. 그래, 이렇게도 떠나보는 거지 뭐. 2시간이 채 안 되는 비행이었다. 오후에 타서 오후에 떨어지는 시차도 없는 짧은 거리에 만족하며 캐리어를 끌고 공항 밖으로 나오니 중국인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와 ‘뭐라고 뭐라고’ 한다. 썩 잘하지 못하는 영어로 억양을 섞어 말하니 정말 ‘뭐라고 뭐라고’라고 들리는데, 그 와중에 ‘택시’라는 단어를 듣고는 아, 택시 타는 곳을 알려주는 서비스인가 보다 하고 아주머니를 따라 나섰다. 승강장에 가니 택시 기사가 아..
내게 온 다섯 번째 봉인 실 오영주 “속에 담고 살지 마 … 만약에 지금 싫은데도 계속 하고 있는 일 있으면, 당장 멈춰. 너 아주 귀한 애야. 알았지?” - 김려령 『우아한 거짓말』중에서 김려령 작가의 전작 『완득이』를 영화화한 이한 감독의 을 보고 끊임없이 주인공 천지를 괴롭히는 화연이라는 인물의 심리를 알고 싶어 책을 펴들었다. 작가는 엄마의 말을 통해 모든 사람은 귀한 존재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생일잔치에 일부러 시간을 잘못 알려주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천지를 고립시키는 화연, 그런 와중에 천지에게 다가가 왕따가 되지 않게 해준 미란, 그리고 천지 주변에 있었던 많은 방관자 혹은 동조자들. 빨간 실뭉치 속 실패에 적힌 천지의 메시지는 엄마와 언니 그리고 화연과 미란에게 전해지고 천지의 언니 만지는 다섯 ..
마을 in 놀•일•터 정다운 요즘 새로운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해야 할 때면 나는 스스로를 ‘놀이활동가 또는 마을활동가’라고 소개한다. ‘마을활동가’라는 단어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참 생소했는데 이제는 스스럼없이 이 이름을 쓰고 있다. 두 아이를 키우며 10여 년 가정에 머물다 보니 경력이 단절되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 이제 ‘다시 일하고 싶다, 사회로 나가야지’하고 여러 길을 찾아보았지만 이곳저곳에서 고배를 마셨다. 아무리 의욕적인 사람이라도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하게 되면 움츠려들게 된다. 우연한 기회에 놀이큐레이터 교육을 받았다. 책 읽고, 공부하는 생활에 익숙한 나에게 몸을 움직여 활동을 하는 놀이는 처음에는 참 낯설고, 생소했다. 그런데 놀이를 배워갈수록 몸과 마음이 생생히 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이것은 마치..
일상의 행복 세 편의 짧은 이야기 김채영 일거양득 = 일타쌍피 “엄마, 감자 삶아 주세요!” 기쁨이의 주문. 엄마도 좋아하는 찐 감자! 기쁨이는 엄마 닮았구나! 엄마는 고구마보다 감자가 더 좋아. 엄마는 친할머니랑 시골서 살 때 가마솥 안에 자잘한 찐 감자가 간식거리였어. 동네아이들과 땅 따먹기, 자치기, 비석치기, 술래잡기 등의 놀이를 하다가 언제든 들락거리며 솥뚜껑 열고 먹었던 “동글동글 조그만 감자”가 아직도 생각나! 압력솥에 쪄야 맛있지! 감자를 씻고, 껍질을 벗기고 삼발이를 찾는데 어, 어디 갔지? 삼발이가 안 보여! 냄비에 삶을 수도 있지만 압력솥에 쪄야 더 고슬고슬 맛이 최고인데, 어쩌지? 아이들의 식사가 끝나갈 때쯤 설거지를 하던 엄마 등 뒤에서 기쁨이의 한마디가 엄마를 두고두고 웃게 만들었다. “엄마..
나를 비춰주는, 매일쓰기의 힘 권남옥 “성공이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지 똑똑하게 아는 일, 자신이 원했던 모습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 조지 쉬언, 『달리기와 존재하기』 중에서. 의사인 조지 쉬언은 40대의 어느 날 의사라는 직업에 염증을 느끼고 대학교수가 되고자 한다. 그는 대학에 지원동기를 솔직히 적었다. “환자를 보는 것이 신물이 나서 다른 일을 찾고 있다.”라고…. 예상한대로 교수 자리를 얻는 것에 낙방한 조지 쉬언은 달리기 시작한다. 취미로서의 달리기가 아니라, 지루한 인생을 걸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한 징검다리로서 달리기 시작한다. 그에게 달리기는 수단이 아니었고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그는 건강을 되찾거나 살을 빼거나 유명해지고자 달리지 않았다. 그저 달리는 행위 안에서 삶을 발견하고 자신을 발견했..
나는 기적을 만났다. 클라라 나는 기적이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어떠한 것 또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내 삶에 기적이 일어난 적도 없었지만 그다지 기적을 바랐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던 유일한 기억은 어린 시절 예방접종 주사를 맞을 때였다. 학교에서 단체로 이루어졌던 예방접종 주사를 맞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던 바로 그 때, 난 그 자리에서 ‘픽~’ 하고 쓰러져서 그순간을 모면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무더운 여름날 학교 전체 조회 시간에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듣느라 전교생이 오와 열을 맞춰 서 있을 때 몸이 약한 학생 한 명 정도는 꼭 ‘픽~’하고 쓰러져 그늘이나 양호실로 옮겨지고는 했었는데 그 상황을 목격할 때면 그 학생이 걱정되는 것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