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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야책_3호

막걸리를 찾아서 - 뜬금여행기2

글 마르

 

 

 아직 해가 넘어가기도 전, 소주 한잔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30년지기 친구와 거기다 토요일이라면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한가? 우리에겐 다만 올 겨울 처음 먹어보는 방어를 작은 거 한 마리 먹을 지, 큰 방어를 잡아서 나눠 파는 걸 한 접시 먹을 지 아주 사소한 고민이 있을 뿐이었다.

 

 우리의 분분한 의견은 거의 모든 생선이 그렇지만 특히 방어는 클수록 더 맛있다는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 정리가 되었고, 두껍게 썰어진 방어회는 접시 위에서 빛나는 자태로 소주잔을 들게 했으며, 젓가락질 한 번에 크게 빈 자리를 만드니 아쉬움으로 또 한잔을 재촉했다.

 

 탁자 위에 소주가 세 병으로 늘어났지만, 아직도 해는 지지 않았고 우리의 이야기도 끝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2차를 생각했다. 시원한 맥주 한 잔 나눌 생각에 괜찮은 호프집을 떠올리다가 방어회의 느끼함을 없애는 데는 맥주보다는 막걸리가 더 나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근처 아무데서나 먹을 까 하다가 불현듯 지난 여름 무척 맛있게 먹었던 막걸리가 생각났다.

 

 “우리 여름에 갔던 막걸리 집 기억나냐? 그 후에도 니가 몇 번 얘기 했던 거 같은데….”

 

 “아, 신설동이었나? 막걸리 주전자?”

 

 “맞아, 거기”

 

 우리의 기억이 합쳐져 작년 여름 그 무덥던 더위도 잊을 만큼 맛있던 막걸리 집을 생각해냈고, 빠르게 탁자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막걸리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우리는 지난 여름 그 더웠던 공간 속으로 이동했다.

 

 체력단련과 서울투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서울의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다녔던 작년 한 해, 그 날이 특히 기억나는 건 누구나 알만한 더위로 뜨거웠던 8월 한 가운데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자와 선글라스 그리고 선크림으로 무장한 나는 청계천 투어를 시작하기 위해 시청역으로 출발했는데 시청으로 향하는 마음속엔 투어에 대한 작은 설렘도 있었던 것 같다. 그 날의 코스는 청계천을 따라 신설동까지 움직이는 조금은 힘든 여정이었지만 나의 서울 투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며, 산도 타는 데 평지쯤이야 가뿐하지 않겠냐며 자신감에 찬 친구가 합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청에서 투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채 몇 걸음 가기도 전에 ‘평지쯤이야’ 했던 우리의 만용을 반성했다. 8월 한 낮의 강렬한 햇빛은 40도에 가까운 폭염을 만들어 냈고, 햇빛을 머금은 바람은 마치 사막과 같은 열기를 뿜어 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따가운 햇빛을 피하기 급급하였기에, 청계천 광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스프링”도 스쳐 지나가는 걸로 마무리하였고, 임시로 설치된 가판대의 매력적인 상품들도 보는 둥 마는 둥 스치듯 지나가며 그늘이 있는 모전교 밑으로 빠르게 움직였고 그늘을 찾아 빠르게 이동하는 것으로 투어 행로가 바뀌었다.

햇빛에 찌그러진 얼굴과 축 늘어진 어깨, 그리고 손 부채질을 하는 친구의 모습에서 패잔병의 모습이 보였고, 내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됐다. 그늘에서 그늘로 이동하는 동안 사람들은 하나 둘, 대열을 벗어 났고 우리 역시 강행하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투어를 다음으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가장 생각나는 것은 시원한 맥주였다. 이것 저것 따질 것도 없이 처음 보이는 호프집에 자리를 잡았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맥주 그리고 가벼운 안주로 우리는 너무 충분했지만, 한동안의 쉼으로 방전되었던 체력을 찾았기에 한 곳에서 계속해서 시간을 허비하기 보단, 맥주를 마시면서
조금씩이라도 이동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서울투어는 맥주 투어가 되었다.

 

 종로 2가를 시작으로 종로3가 뒷골목에서, 종로5가 광장시장에서 그리고 광장시장 옆에 자리한
신진시장으로 옮겨가며 때로는 시원한 맥주를, 때로는 미지근한 맥주를 시장의 안주들과 함께 먹으며 이런 여행도 나름 괜찮다고 느낄 즈음 동대문에 도착했다.

 

 “어, 저기서도 맥주를 파네?”

 

신기한 마음에 들어 선 곳은 동대문 옆에 위치한 KFC 였다. 김빠진 클라우드에 실망했지만, 어느 더운 날 목축임 정도로는 괜찮겠다며 맥주 투어 지도에 끼어 주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해도 발걸음을 옮기기가 힘든지 여름 날의 해넘이는 더디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은 발자국 수를
남겼는데도 해는 여전히 걸려 있었고, 열기를 거둬들이지 않았다. 시간 보다 먼저 체력이 방전된 우리는 오늘의 투어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에게 마무리란 잘 가라는 인사가 아니라 가볍게 한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한 잔을 기울이기 좋은 주변의 술집을 찾았다. 그리고 마무리 된 줄 알았던 우리 여행이 여기서 다시 시작되었다. 동묘 뒤쪽 위치한 허름한 해장국 집의 이름은 “전주 순대국 해장국” 이었다. 가게 이름에 전주라는 지역명을 앞세웠어도 순대국과 해장국이 먼저인지 간판의 대부분을 차지한 건 주 메뉴의 이름이었다.

 

전주 순대국 해장국


 주 메뉴가 직접 담근 막걸리와 홍어회라는 말에 우리는 막걸리 한 주전자와 홍어회 한 접시를 시켰고, 홍어회가 나오기 전에 막걸리를 먼저 잔에 따른 다음 한 모금씩 들이켰다. 저절로 ‘크으’ 소리가 날 만큼 막걸리는 맛있었고 또 시원했다. 곧이어 나온 홍어회도 막걸리 안주로 손색이 없었는데, 부른 배가 아쉬웠다.

 

맛있고 시원했던 막걸리

 우리 테이블로 몇 번의 발걸음을 하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 것은 안주를 만들어 주시는 할머니가
주인이며 연세가 여든 넷이라는 것과 홀에서 서빙을 하시는 할머니가 주인 할머니 보다 다섯 살이나 작고 (이 부분을 강조하셨다.) 20년 넘게 함께 하셨다고 했다. 아직 먹어보지 못한 안주와 할머니들의 지난 20년 얘기를 다음으로 기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너의 그 쓸데없는 열정만 아니었어도 끝까지 버텼을 걸? 아주 신났다고 그늘도 무시하고 가더니 금새 진이 빠져서는, 마치 적에게 잡혔다가 간신히 탈출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패잔병 같은 모습이었지 아마.”


 까맣게 잊어 버린 것 같았던 그 날의 기억이 성큼 다가왔다.


 “별 거 아니라며, 선크림하고 선글라스면 충분하다고 물 한 병 준비 안 한 건 너 거든.”

 

 오랜 친구는 이래서 좋았다. 별거 아닌 걸로 티격태격하면서 지난 시간과 현재를 넘나드는 즐거움으로 대강의 위치는 기억하지만 정확히 가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같은 곳을 두세 번씩 돌아 다녀도 짜증보다는 즐거운 마음이 된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기억까지도 재생시키는지 좀 전까지도 보이지 않았던 가게의 간판이 크게 다가왔다.

계절이 두 번 이나 바뀌었지만 가게는 변함이 없었다. 메뉴도 그대로고 할머니 두 분도 우리를
기억하고 계셔서 마치 그날 홍어회를 먹고 또 다른 안주를 시키며 시간을 이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막걸리 한 주전자가 먼저 도착했고, 우리는 그 시원함에 다시 ‘크아’ 소리를 내 뱉었다. 그리고 물이 좋다며 추천해 준 꼬막 안주를 시작으로 메뉴판의 거의 모든 안주를 먹은 듯 하다.
이 집의 안주는 푸짐하다기 보다 싸고 다양한 편인데, 우리야 안주 욕심에 이것 저것 다 젓가락을 대 보았지만 이 집의 주 단골들은 그저 막걸리 한 잔에 그 날의 안주 한 접시면 지친 하루를 마감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두 할머님의 티격태격하는 말 싸움 같은 대화와 옛날
이야기는 또 다른 별미 안주가 되어 주전자의 개수를 늘렸고,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우리는 어느 날 방어회를 먹다가 혹은 홍어회가 생각날 때 평일에는 7시에 문을 닫는다며 우리의 퇴근시간을 아쉬워했던 모습이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뜨거운 여름 날 불현듯이 자주 오겠다는 말에 웃으시던 할머니들의 모습이 떠 오를지도 모르겠다. 그 때는 헤매지 않고 갈 수 있을까? 아니 할머니들이 언제까지 장사를 계속할 수 있을까? 지금 막걸리를 먹으러 가야겠다. 뜬금없이 막걸리를 찾아 나섰던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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