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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야책_4호

자신으로부터의 탈출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를 기억하며

김가희

 

 

지난 호에서 회고록을 남긴 여성독립운동가 이은숙에 대해 다루면서  호에는 정정화에 대해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은숙처럼 정정화도 가족과 함께 독립운동을  독립운동가이다. 

해방 이후에 성북구에 거주하였고 長江日記』 * 라는 회고록을 남겼다는 점에서 이은숙과의 통점을 찾을  있다. 

이은숙의 회고록은 출판 시기에 따라 책의 제목과 부제가 조금씩 달라졌는데 이번 글에서도 역시 『長江日記』라는 

제목과 부제를 살펴봄으로써 글을 시작하려 한다.

 

 세계에서   째로  강인 장강은 양쯔강의 다른 이름으로 상해··우한·충칭과 같은 거대도시들이 

  유역에 자리 잡고 있다. 상해 아니라 난징, 충칭 역시 임시정부가 거쳐  곳이다. 장강의  역사에 비하면 27년의 임시정부 시절은 찰나라   있겠지만 조국을 잃고  망명자들에게  세월은 장강의 푸른 물줄기처럼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고도 무서운 설움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長江日記』 부제는 「양자강 푸른 물결 위에 실린  여성 독립운동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이다. 나라 잃고 

임시정부라는 배에 몸을 맡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어지는 일을 묵묵히    여성 독립운동가. 

그녀의 이름이 바로 정정화이다.

 

『長江日記』는 정정화가 상해에 있는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 찾아 떠나는 1920 1 초순 서울역의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의 상해 행에 대해  자신으로부터의 탈출**(18)이라고 표현하며 고난의 길이겠지만 자신이 택한 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자신으로부터의 탈출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정화는 내가 이름  자를 걸고 항일 독립 운동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여든 여덟의 나이되도록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투사들과 생사존몰을 같이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일을 주었,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8)

라고 말하며 자신의 독립운동에  겸허한 자세로 일관한다.

 

정정화가 비록 시아버지와 남편을 뒷바라지 하려는 마음에서 출발했을지라도 독립운동가인 시아버지와 남편을 찾아 

떠나는 젊은 여성의 택을 사사로운 일이라고만 말할  없다. , 며느리, 아내로서 주어진 할에만 충실했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강한 의지에   여성은   서울역 

역사를 빠져나가는 열차처럼 과거로부터 탈출하여 인생 변곡점을 넘고 있었다.

 

당시에도 이른 나이인 열한 살에 결혼을 하게  정정화는 양대판서 이라고 불리는 명문가 출신으로 종일품 

지위까지 오른 김가진의 아들 의한을 남편으로 맞이한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정정화는 시집살이를

어려워했음에도 시아버지의 자상한 인품과 인자함에 대한 존경심이 . 서출 출신이었던 시아버지 김가진은 

서른이 넘어서도 과거에 응시를 못하다가 적서를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상소”(25) 덕분에 34  

규장각의 말직으로 시작해 종일품의 직위까지 오른 인물로 혁을 주장하였으며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경술년인 1910년에 합방을 하면서 일본은 귀족에게 작위를 주었고 왕족은 물론 종일품 이상의 관직 가진 

사람들에게도 조선귀족력에 따라 작위를 부여했다.   김가진은 공개적으로 작위를 거부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작위에 따라 주어지 연금은 끝내 받기를 거부했다.

 

정정화는 신문기사를 보고 김가진과 김의한이 상해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화려한 관직과 일본의 

작위까지 받은 고관의 해외망명이라는 사실은 국내외에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홍보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작위와 관련한 정정화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침략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일본도  나라에서 전래되어  지배체제를 활용하 

지배층에게는 어느 정도의 특권을 존속시키며 그들을 이용하고,  한편으로 들과 

더불어 백성에 대한 수탈을 꾀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라의 많은 주들은 

왜놈의 수족이 되어 그들을 도움으로써 스스로를 더욱 살찌워 나갔다. (29)

 

침략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일본과 결탁한 지배층을 비판함과 동시에 정정화는 동학 농민혁명을 민권과 민생을 

위한 투쟁이었으며, 척양척왜의 자주 독립투쟁”(27)으로 규정한다. 정정화는 회고록에서 자신의 이야기와 가족, 

임정에 얽힌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항일 투쟁의 역사는 물론 세계정세에 대한 분석을 자세히 제시한다.

 

상해에 도착한 정정화는 임정에서 활기찬 움직임을 체감하지만 밥상 올릴 식량을 걱정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하는 어려운 생활에 닥치게 된다. 정정화는  상황을 보고만 있을  없었다. 그녀는 국내에 들어가 돈을 

구해오겠다는 의사를 임정에 먼저 전달할 정도로 주체적인 여성이었다. 친정에 가서 돈을 구해 오려던 그녀의 

개인적인 계획은 통제를 이용해 독립자금을 조성하는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임무가 되었으며    여섯 번이나 

국내를 왕래하게 된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일을 그녀 스스로 찾아서 했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여성정책은 급진적이었다. 대한민국임시헌장에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3), 대한민국의 인민은 공민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  피선거권이 ’(5), 그리고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납세  병역의 의무가 ’(6) 등의 조항이 있다. 여성의 선거권 획득이 영국과 미국이 

 1928, 1920년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임시정부의 여성에 대한 인식 서구에 비해서도 매우 앞섰다. 

아시아에서도 중국이 헌법문서에 성의 참정권을 삽입한 것이 1931 무렵이었고 일본은 1890년에 제정 

집회  정사법 통해 여성의 정당  결사 가입과 정치연설회 가를 아예 금지했으며 1925 보통선거제가 

실시될 때도 여성은 제외되었었다고 한다.(115)***

 

상해에는 대한부인회 등의 여성모임들이 있었는데 주로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들이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정화는 거기에  생각을 하지 못했던  같다. 정정화는 아버지의 반대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정정화가 신식교육을 받았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당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여성들의  전체가 

안타깝기만 하다. 임시정부에서 헌법적 가치로 남녀평등을 인정한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띄지 현실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역할은 유교적 가치관에서 크게 벗어나 못했다.

 

임정에 소속되어 있는 부인들은 각자의 생활이 풍요롭거나 풍족한 편은

아니었지만  손에서 일이 떠나지 않았다. 임정이나 광복군 또는 임정산하단체의 

모든 행사에는  부인네들의 손길이 닿았고 자녀들의 교육을 지도하는일도 

부인네들의 책임 하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정화는 살림과 시아버지 뒷바라지 그리고 임정의 안살림 등에 전념하면서도 보다 많은 것을 배워야 되겠다고”(65) 

생각하며 성제 이시영, 세관 유인욱  분으로부터 한학과 역사, 영어까지 배웠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컸던 정정화는 

틈틈이 겨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책을 놓지 않았”(174) 한다. 그녀가 회고록을 펴낸 것이 1987년이고 보면 

1900생인 그녀 나이 여든여덟 되는 해였다. 정정화의 아들 김자동은 어머님  연세와 한쪽 눈을 실명한 

상태로도 돋보기에 확대경까지 들고  읽으셨다고 회상한다.

 

해방  정정화는 공부를 가르쳐  부통령 이시영으로부터 감찰위원 위원을 맡으라는 제안을 받는다. 

감찰위원회는 손문 정권의 감찰원 본떠 만든 것으로 이시영은  감찰위원회를 통해 모든 부정부패를 억제할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정정화는 단독정부에 반대해 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시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없었다. 녀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을 민족에 죄를 짓는 것으로 여겼다. 민족이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고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 찬반으로 나누어진  속에서 정정화는 정계에 나가 임정에서 쌓은 정치적 안목을 펼칠 회를 찾지 못했다.

 

長江日記 에는 세계정세와 역사에 대한 정정화의 인식을 여러 에서 찾아볼  있다. 그녀가 세계정세를 자세히 

설명한 사실은 임정과우리나라를 둘러싼 일본, 중국  인접 상황이나 수시로 변화하는  질서의 맥을 무시해서는 결코  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139) 때문이다.

 

중국이 일본의 손아귀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중국을 둘러싼 세계열강의 움직임과 

일본의 치밀한 침략계획을 과소평가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자국 내에 아무리 

막강한 힘이 축적되어 있더라고 국제정치질서의 세력판도를 읽을 능력이 없으면 국제질서에서 소외되고, 

결과적으로 피지배의 비운을 맞게 되는 것이다. (129)

 

 설명은 1936 12월에 일어난 서안사변****  개략적으로 설명하기 앞서 정정화가  말이다. 정정화가 

서안사변에 대해 길게 설명하는 배경으로는 서안사변 후에 중국이 일본과 맞서 싸우는 입장을 취했고 영향으로 

중국에서 한인 독립운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고 평가하 때문이다. 長江日記』에는 서안사변  아니라 

중일전쟁과 태평양 쟁은 물론 2 세계대전을 둘러싼  국가들의 입장에 대한 정정화의 안목이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정세에 대한 안목이 필요했던 임정의 상황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임정은 무장투쟁론을 포기하지 않는 동시에 중국은 물론 세계로부터 임시정부를 망명정부로 승인받으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1941 10 정은 중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이 여러 면에서 괄목할만한 진전이 있었다고 판단하여 중국 

정부에 정식 승인을 요청했다. 임정은 독재와 침략전쟁에 반대하는 루스벨트와 처칠의 대서양헌장에 지지성명을 

발표했으며 런던에 있는 프랑스와 폴란드 망명 집단에 대한 영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보면서 임정 또한 망명정부로 

승인 받을  있는 좋은 기회가 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정식 승인을 받는 데는 결국 실패했. 

정정화는  원인을 동포의 망명세력 간에 이루지 못한 단합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임시정부가 당시 연안에 망명한 우리의 독립동맹계와도 원활한 유대를 맺었어야 했다”(195)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광복군 선발대의 국내 투입을 목전에 두고 이뤄진 일본의 항복과 해방소식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회환을 

남겼다. 해방을 맞이했지만 시정부의 요원들조차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화는 해방  

한참이 지난 시기인 1946 5 9 고향 땅으로 가려고 상해부두에  있었다.

 

간다. 들어간다. 이제야  살던 산천에 간다. 전쟁난민이라고 업신여김을 당하면 떠랴. 

돼지우리 같은 엘에스티 같은 난민선을 타면 어떠랴. 거룻배라도 좋다. 주낙배라도 좋다. 

고향으로 가는 것이라면 일엽편주인들 어떠랴. (265)

 

난민이나 거지  취급을 받으며 중국에서 추방당해 난민수송선을  돌아온 정정화 일행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국에 돌아왔지만 바로  땅을 밟지  했다. 미군은 방역과 통관 절차를 이유로 그들을 부산 바다에 

사흘이나  잡아두었다. 내나라 땅의 주인이 이제는 미국이라 사실을 실감한 사건이었다. 일본 침략자들이 

사라진 땅에서는 새로운 권력을 탐하는 자들의 횡포가 이어지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가  때마다 

기어 올라와 설쳐대는 경찰관들의 위세는 왜정 때의 경찰을 그대로 뽑아다 박아놓은 것만 같았다 정정화는 

회상한다. 해방  아온 고국은 그녀를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정정화에게  하나의 시련을 

안겨준다. 남편 김의한은 납북되었고 본인은 부역죄로 옥살이를 경험한다.   정정화는 특별한 대외활동은 하지 

않았으며 여든여덟에 양자강 푸른 물결 위에 실린  여성 독립운동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長江日記  

남기고 여생을 마감했다.

 

長江日記』는 후손들에게 소중한 기록물이다. 長江日記』는 정정화 개인의 역사와 임정  일제강점기 시절에 대한 

여러 정보를 제공해줄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본인의 선택을 사사로운 선택이었다고 말하며 임정에 맡긴 일을 했을 뿐이라는 정정화 선생을 보면서 우리들 역시 

너는  어떤 선택을 하였고 하루하루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는가?” 묻게 된다.

 

 

 

*정정화. 長江日記』. 학민사, 2018.

** . 18. 앞으로 책의 직접 인용은 페이지만 표기한다.

***이준식,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여성독립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2009. 108-41.

****시안 사건 또는 서안사건, 시안 사태, 시안 사변(중국어 정체자: 西安事變, 간체자: 西安事, 병음: Xī'ān Shìbìan) 

1936 12 12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이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제스를 산시 성의 성도(省都) 시안(西安) 

화청지에서 납치하여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사건으로 국민당군과 홍군은 국공 내전을 중지하고 2 국공 합작이 이루어져 함께  일본 전쟁을 수행하

 계기가 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시안_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