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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야책_3호

십대들의 마음사전*

오디세이학교(민들레 친구들)

 

 

 표정과 눈빛 (유윤경)
 표정과 눈빛은 한 끗 차이다. 둘 다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이지만 표정 안에 눈빛이라는 도구가 들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표정은 눈, 코, 입, 얼굴 주름 등을 이용한다. 이 안에 눈빛도 들어간다. 하지만 표정은 의도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나의 감정과 다르게 속일 수 있다. 그리고 표정은 얼굴의 모든 것을 움직이기 때문에 누구나 볼 수 있는 큰 제스처이다. 반면, 눈빛은 숨길 수 없다. 한 인터넷에서 본 것인데 ‘진짜 웃음은 눈가의 주름도 같이 주름지며 웃는 것이다.

 

하지만 가짜 웃음은 입은 웃고 있지만 눈가에 주름이 지지 않는다. 즉,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은 게 가짜 웃음이다.’ 이렇게 표정은 웃고 있어도 표정에 따라 가짜, 진짜를 구별하는 방법이 나오는 것처럼 눈빛은 속일 수 없다. (눈가의 주름과 눈빛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또한 눈빛은 표정과 달리 아무나 읽을 수 없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목사님은 눈빛을 보고 내가 화났는지 알아채시고 물어보신다.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어서 열심히 눈빛을 읽어봤는데 잘 안 된다. 눈빛을 읽는 것은 삶의 지혜로 터득할 수 있겠지만 눈빛은 아무나 읽을 수 없다.

 

 자존심과 자존감 (김도은)
 쉽게 비유하자면 누군가 날 때리는 것은 넘어갈 수 있지만 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 자존심, 누군가 날 욕하는 것은 넘어갈 수 있지만 때리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 자존감. 자존심과 자존감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한자부터가, 자존심(自尊心)은 남에게 굽히지 않고 자신을 높여 세우는 마음(心)이니까. 자존감은 마음이 아니라 감, 그렇게 느끼는 것이니까.

 

 살면서 자존심과 자존감은 없으면 곤란한 존재다. 반대로 너무 넘쳐도 곤란하다. 없으면 밑바닥에서 기어가며 살아도 이상한지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고, 넘쳐흐르면 자기 의견과 기세를 꺾을 줄 모르는 누구처럼 되어버리니까. 이 유형은 간혹 굉장히 쉽게 무너지는 경우도 있다. 탑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탑을 하나도 쌓지 않는 사람과 탑을 너무 높게 쌓아 위태로운 사람. 그렇게 생각하면 탑이 너무 높거나 낮은 사람은 불쌍하다.

 

 자존심과 자존감 둘 다 자기방어에서 나온다. 특정 부위를 찔렸을 때 자존심/자존감을 내세우며 방어하는 모습을 보면 불쌍해 보인다.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추잡해 보이기도 하고 열정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이 세상 모든 생물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했다면 이런 감정은 애초에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지도 않았겠지.

 

 자존감과 자존심 (유윤경)
 자존감과 자존심. 전부터 관심 있던 질문인데 지금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다. 자존감은 자아존중감이다. 즉, 내가 나를 사랑해주고 존중하는 마음이다. 자존감이 없으면 일상생활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당장 인간관계에서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게 외로움을 느끼고, 힘들어 하며 극단적으로는 나를 해칠 수 있다. 사람들이 힘들다고 느끼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자존감이다. 결론적으로, 자존감 없인 살 수 없다. 반면, 자존심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오히려 없어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같잖은 자존심 때문에 일을 망치는 경우가 있다. 즉, 자존심은 때에 따라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선택형이지만 자존감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필수형인 것 같다.

 

 질투와 시기 (김도은)
 질투,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 나타나는 감정의 응어리.

 시기, 나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느끼는 증오.

 

 질투와 시기는 어딘가 애증이 묻어나오는 것 같다. 특정한 누군가를 부러워하며 자극된 열등감이 증오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뭐가 다른 것일까? 질투는 사람 자체에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고, 시기는 그 사람의 능력에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 어느 쪽이 더 비참할까 생각하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처절해지기에 그만두게 된다. 사랑과 존경에서 나오는 샘과 미움.

 

 사람이 질투와 시기를 느끼는 상황은 너무나 많다. 하다못해 동물들도 느끼는데 말이지! 하지만 인간의 경우 다른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생물이니 그 점이 더 불쌍하고 발악적인 것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질투와 시기를 떨쳐내는 방법을 모른다. 이미 그 감정을 느끼는 순간부터 족쇄에 사로잡힌 듯 헤어 나올 수 없고 떨쳐내려고 생각하려는 순간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깊어질 수도 있다. 인간은 생각하기에 나약해질 수도 있는 동물인가보다.

 질투와 시기 (서정민)
 질투는 자기 것을 뺏기면 질투하는 것이고 시기는 남이 잘되는 것 자체를 배 아파 하는 것 이다. 적당한 질투는 연인사이에 필요하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연락하면 질투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어떻게 표현하는지 따라서 결과가 다를 것 같다. 표현을 잘하면 상대방도 자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시기는 안 하는게 좋을 것 같다. 그냥 누군가가 잘 되는 것 자체를 배 아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나 상대방 둘 다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이기심과 자기애 (이한)
 나만 좋은 것이 이기심, 나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애다. 이기심은 자기애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애는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나를 사랑하고 가치를 높이고 싶은 것은 내 이익만을 꾀해서 남에게 피해를 끼친다거나 하는 일은 아니니까. 이게 과부하에 빠지면 그게 이기심이 되는 거다.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게 되는 것. 그게 이기심, 날 사랑하는 것이 자기애.

 

 반항과 저항 (김치성)
 반항의 경우 예를 들어 자식이 부모에게 대들거나, 학생이 선생님에게 대드는 사례가 연상되곤 한다. 이런 일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대체로 그저 단순한 충동,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일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것을 반항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반항은 의지가 꽤 가볍다. 그저 충동으로 표출되는 것일 뿐 그 외에 어떠한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자립심의 원동력이 된다면 몰라도).

 

 한편 저항의 경우 무언가 거대한 힘에 미약하게나마 맞서는 것이 연상되며, 이 원동력은 그저 단순한 충동이 아닌 변화에 대한 욕구, 분노로 점철된다. 또한 반항과는 다르게 일회성이라고 볼 수 없다. 애초에 그 저항의 대상이 그것을 굴복시키거나 굴복하지 않는 한 끝나는 것이 요원하다. 의지도 반항과는 다르게 무거운 것이, 반항이 충동이나 호기심, 즉 그다지 진지하지 않은 자세로 시작된다면, 저항에는 결국 무언가를 강렬히 원하며, 압제에 맞서고자 하는 욕구가 주로 자리 잡고 있다.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의지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반항은 쉽고 저항은 어렵다. 둘 중 무엇을 선택할지는 의지의 진중함이 높고 낮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사실과 진실 (이한)
 사실이 아닌 것은 허구인데, 진실이 아닌 것은 거짓이다. 우리는 실재하는 나의 솔직한 생각이나 어떤 사건을 말하기 전에 사실, 이라는 전제를 깐다. 이것은 허구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부분적인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전체를 가리키는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 텀블러를 위에서 바라보면 원이고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텀블러 전체가 원인 게 진실은 아니다.


 사실과 진실 (이무현)
 사실은 바꿀 수 없는 그 자체이다. 하지만 진실은 변화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태양은 둥글다’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변할 수도 있고 그런 내 마음을 숨길 수도 있기 때문에 진실은 변할 수 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말처럼 진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사실과 진실 (이성주)
 위키(Wiki)는 사실만을 말하는가? 언론은 진실만을 전하는가?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어느 부분을 말하느냐에 따라 왜곡 될 수도 있다. ‘악마의 편집’ 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인가? ‘이 사람이 이랬대’라는 사실에 MSG 조금만 쳐도 그 사람은 천하의 ‘몹쓸 놈’이 될 수도 있고 최고의 선행을 베푼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언론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위키와 언론 둘 중에서 어떤 것에 더 주목을 할까? 간혹 위키가 언론보다 나을 때도 있다. 위키의 경우에는 굉장히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성별, 정치성향, 종교, 동성애자, (어떤 것 이든)덕후 등)이 모인다. 물론 위키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큰 위키일수록 다양한 서술이 포함되어있다.


 솔직함과 정직함 (서정민)
 솔직함은 생각 없이 있는 사실을 자신의 감정과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솔직함은 가끔 필요하고 가끔은 필요 없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의의 거짓말을 할 땐 솔직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정직함은 도덕적인 생각 을 하며 말하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나 말을 할 때 ‘정직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정직한건 항상 정직해야 한다.

 

 솔직함과 정직함 (이무현)
솔직함은 내 맘이다. 진실을 숨기고 있다가 말한 것이다. 정직함은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착함과 선함 (송지민)
 보통 사람들이 타인을 위해 좋은 일을 했을 때 사람들은 착하다고 하지 선하다고 하진 않는다. 착하다는 것은 고의적인 선의, 선하다는 선하다 그 자체.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과연 관대해지고 착해 질 수 있을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나 잘 보여야 하는 사람에게 어쩔 수 없이 착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 부분에서 착함은 목적을 가지고 베푸는 선의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선한 것은 아무 목적 없이 그 사람이 좋든 싫든 선하게 대해주는 것이다.

 

 순수함과 순진함 (송지민)
 순진한 것은 무엇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고 순수한 것은 무엇에 대해 아예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순수해지기에는 너무 힘들 것 같다. 성격이 순수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전하고 싶어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순진하다고 해서 그게 멍청하다는 뜻은 아니다. 아직 미숙한 것이지, 덜떨어진 게 아니다. 그런데 성격이 순수하면 사람들에게 오해를 많이 살 것 같고 순진하면 사람들에게 많이 속고 다닐 것 같다. 결론은 난 둘 다 싫다.

*) 오디세이학교_민들레 친구들이 ‘문학과 성장’ 시간에 만든 ‘주관적인’ 마음사전 일부를 나눕니다. 마음을 나타내는 단어들은 김소연 시인의 『마음사전』에서 가져온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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