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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야책_4호

김진태 회장님에게 듣는 아리랑시장

 글 김정훈

 

 

 

 

 호박이넝쿨책-야책이 처음 자리를  곳은 아리랑시장(정릉역2번출구) 구였는데 

바로 옆집이 시장 상인회 사무실이었다.  덕에 상인회에 가입하고 장님과도 관계를 

맺었으나 오며가며 사나 나누는 정도 말고는 회장님과  상의 관계를 맺지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인회 김진태 회장님과 호박이넝쿨책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끈한

인연이 있었나 보다. 재작년말에 상인 사무실이 먼저 이전을 했고, 작년 4월에는 호박이넝쿨책 

또한 이사를 했는, ,’ 이번에도 역시 상인회 사무실 바로 책방 옆집이었다. 

상인회 사무실은 회장님댁에 붙어있는지라 작년부터는  자주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장님 또한 책방 행사에도 한두  참여를 해주시고 책방회비도 내주셨다.  또한 자연스레 

책방에서 진행되는 일들을 장님께 알리다 보니  관계 속에서 오늘의 만남까지 마련된  같다.

 

 

아리랑 시장의 과거

 

상인회 회장님이시니 자연스레 시장에 대한 문과 답으로 얘기가 시작되었다. 

회장님 말씀에 따르면 아리랑시장을 관통하고 있는 도로는  금천이라고 불릴 정도로 

맑은 물이 흐르는 천이었는데 전쟁   개천가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형성 시장은 나중에 분구되기 전의 성북구 (지금의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를 아우르는 )에서 

돈암시장 다음으로  시장이 되었단다. 여기서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사실 하나도 씀 해주신다. 

개천은 나라에서 덮은  아니고  상인들이 덮은 것이라고. 

 지금의 도로 위에 원래 아리랑시장의 점포들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아리랑시장과 비교했을  당시 시장의규모가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가는 대목이다. 

장이 그렇게 컸었단 얘기는 장사도 무척  되었다는 얘기일 것이다. 

당시 여기서 장사하는 람들, 2년마다  하나씩  사면 다들 바보라  회장님 말씀에서 

당시의 시장이 얼마나  활력이 넘쳤을지 조금  상상해본다.

하지만 1990년대 말에서 2000 즈음 우리나라의 왕릉들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시도를  , 

네스코에서 내건 조건 중에  들어가는 길을 넓혀라 조항이 있었고 2009 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때까지 점포들의 들을 수용하여 길을 넓히면서 현재의 도로가 만들어졌단다.

 

 

시장을 다시 살리려면

 

 그렇다면  시장을 다시 살리려면 지금의 도로를 막아야 하는지 질문 드리자, 회장님은 그에 대한 답을 

포함하여 다음과 같이 아리랑시장 대한 청사진을 내놓는다. 이미 회장님이 이뤄낸 것부터 소개하면 

리랑시장을 전통시장으로 등록시킨 것이다.

 “전통시장 등록이 어려워요. 우리보다 훨씬  시장들도 등록까지 5정도 걸렸다는데, 우리는 3개월 만에 했어요. 

제가 구청직원들과 출퇴근 같이 하며 아예 구청에서 살다시피 했거든요. 필요한 서류들 있으면    작성해서 

제출하면서 했어요.”

 이 정도로 열정이  사람의 인생은  어땠을지 궁금해졌지만 일단  얘기를  들어본다. 전통시장으로 

등록되면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여러 관련 기관들의 지원금을 받을  있는데, 회장님은 이런 지원금으로 

 곳이 시장임을 나타낼  있는 홍문과 같은 조형물을 세우고  점포들의 간판을 통일성 있게 교체하는 일을 

진행했다. 앞으로 우회도로를 확충하여 지금의 시장 길을 막고 시장 주변으로 주차장을 확보할 계획이 있으시단다. 

그렇게 시장이 시장으로서의 모습을 갖추면 회장님 최종적으로  아리랑시장이 먹거리장터로 기능하길 바란다. 

흥미로 대목이다. 마을에 접근이 쉬운 먹거리장터가 만들어진다니!

 

 회장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러 장벽을 넘어야할  같다. 무엇보다도 인근 아파트 주민들과의 합의가 필요해 보인다. 회장님  따르면 특히 시장 조형물 설치나 우회도로를 내는 문제에 의견대립이 있는  같다. 

지금까지 차를 몰고 지나던 시장 길이 막히니  것도 같지만, 회장님이 계획하고 있는 우회도로라면 외려 교통이

 편해질 것도 같다. 하지만 크게 걱정되지는 않는다. 워낙에 열정 강한 분이라 반대하는 주민들과도 계속 소통해나가며 일정한 의를 이뤄내시기에 분명할 것이기에.

 

 그나저나 회장님은  이리도 어려운 일을 계속해나가는 것일까?  상인회 회장이라는 업무가 고생스럽진 않은지 

질문하지 않을 없었다. 일종의 시장상인회 준비위원회가 2011년에 결성되었는데,  모임이 정식 상인회까지 

이어지질  하고 있었단다. 그러던 당시 지역의 정치인과 주민들이 김진태 회장님이  모임을 맡아서

상인회까지 만들어내길 강권했다고 한다. 당시 강권했던 사람들이 사람 보는 눈은 좋았던가 보다. 

김진태회장님이 모임을 맡은   상인회가 결성되었다. 2013년에 발족되었으니  오래 동안 직을 유지하고 

계시나 아직 회장님만큼 회장으로서 상인회에 열정을  사람이 없나보다.

 

 

인간 김진태

 열정에는 사실 개인의 희생이 따른다. 시간은 물론 돈까지. 지난 석을 비롯하여 아리랑시장에선 매해 명절마다 

이런저런 행사를 벌이는데, 공연예술인들의 개런티를 비롯해서 회장님의 부담도 만만찮 듯하다. 상인회 회원들께 

그만두겠다는 말씀도 여러  하셨었다 실제로 마음의 고심도 많으신  같다. 

하지만 2016년에 여러  교수들을 초빙하여 진행한 상인대학 과정을 이수한 상인들이 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그들 속에서 상인회 사무장을 맡아 회장님 열심히 돕는 회원도 나오는 것을 보며 많은 힘을 얻으시기도 한단다.

상인회를 통해 상인들이 보다 발전해간다는 말씀에 회장님이 정말   하고 계시는구나, 마음이 찡하다. 

이렇게 자신이 맡은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회장님의 개인사 또한 궁금치 않을  없다.

 개인으로서의 회장님은 유도인이자 검도인이며  한편 음악인이기 하다. 회장님뿐만 아니라 아들  또한 모두 

유단자들이라 회장님  남자들의 무술 단수가 수십 단이란다. 무술로 단련된 정신과 몸이라 그런가? 

젊은 시절부터 회장님은 여러 사업에 호방하게 뛰어들어 나름  성공도 거두고  그만큼의 배신과 실패도 겪었단다. 시련의 시절마 회장님은 시를 쓰며 마음을 달랬다며  시절 썼던 시들을   낭송 주시는데 시심이 참으로 

맑고 깨끗하다. 젊은 시절 탁월한 기타실력 덕에 신중현에게 발탁된 얘기부터 (요즘도 성인들을 가르치는 음악선생

님이시기도 하다) 시골 중학교에서 바닥을 치던 학생 여섯을 한학기만 전교 1등에서 6등까지 차지하도록 지도했던 

과외선생님 시절의 얘기 어찌나 재미있게 들려주시던지 ….

 지면의 한계상  모든 얘기 모두 담아낼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으로 열정 넘치는 김진태회장님과 함께 

아리랑시장도 발전하여 점포가 150개나 되었다던  시절의 영광을 되찾길 바란다. 더불어 시장이 아야 지역이 

살고 시장이 죽으면 지역도 죽는다는 회장님의 말씀처럼, 아리랑시장과 함께 우리 동네 정릉도 더더욱 활력 넘치는 

동네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