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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야책_3호

기억(옛 것)

글 김준엽

 

 시간을 거슬러 30여 년 전,
 코 찔찔이 꼬마 아이는 정릉동 온 동네 골목골목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며 말썽과 소란을 피우던 ‘악동,’ 즉 골목대장이었다.


 어디에선가 ‘부아아아앙’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하면 사자머리가 손잡이를 물고 있는 자기 집 녹슨 철문을 박차고 나오며 소리를 지르곤 했는데, 그 소리는 작은 체구의 꼬마 아이에게서 나왔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 동네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곤 했다.

 

 “소독차 왔다!!”

 

 골목대장의 외침이 끝나기도 무섭게 집집마다의 녹슨 대문들이 활짝 열리며 아이들이 뛰쳐나왔다. 아마 아이들도 소독차 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어디?”
“어디쯤 왔어?”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아이들의 시선이 닿은 곳은 저 밑 구부러진 길에 위치한 파란 기와집. 그리고 이내 기와 너머로 하얀 연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골목대장과 아이들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소독차가 눈에 들어오길 숨죽여 기다렸다. 마치 올림픽 금메달 결승 경기처럼 긴장감마저 맴돌았다.

 

 순간, 소독차가 우회전 하면서 소독차 특유의 형체가 아이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나 달려 나가는 아이는 없었다. 소독차의 꽁무니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

 

 그러다 드디어 소독차가 우회전을 마치며 아이들과 정면으로 마주보게 된 순간, 아이들은 전쟁에 나간 병사들처럼 저마다의 괴성과 환호를 지르며 소독차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소독차의 뒤꽁무니에 달라붙어 ‘아~’하고 입을 벌리며 양팔 또한 좌우로 활짝 열었다. 회상하건데 당시에는 그렇게 온 몸과 몸속 내장기관 하나하나까지 연기를 마셔야만 건강해지는 줄 알았다.

 

 소독차나 똥차, 칼갈이 아저씨가 오지 않는 날에는 아이들은 심심해했다. 그래서 동네 돌산에 놀러 가거나 개미를 잡아 개미 똥구멍을 빨아먹거나 모래로 두꺼비집을 만들며 놀기도 했다.
 물론 역사상 전무후무한 ‘후레쉬맨’ 놀이도 있었다. 대장 격인 한 아이가

 

 “간다! 프리즘 후레쉬다.” 라고 외치면 나머지 아이들이

 

 “오케이”
 “오케이”

 

 순차적으로 외치며 변신장면을 따라했다. 변신을 마친 후에는 모두 다 같이

 

 “지구 방위대 후레쉬맨!”

 

이라는 초절정 명대사를 읊으며 전대물 특유의 폼들을 잡았다. 이 놀이를 하기 전에는 항상 서로 그린, 블루, 옐로우, 핑크 등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하겠다며 옥신각신 다투기도 했었다.

 

 하지만 정릉동 꼬꼬마들이 가장 좋아했던 놀이는 바로 ‘얼음땡’과 ‘숨바꼭질’ 놀이였다. 어떤 날에는 얼음땡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기 위해 인수동시장까지 내려가곤 했었는데, 잠깐 부연 설명을 하자면 당시의 인수동시장은 지금 길음역에서 계성고등학교까지의 거리를 의미한다.

 

 당시 내 기억의 인수동시장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지금도 존재하는 길음시장과 아리랑시장, 정릉시장보다 최소 두 세배 이상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수동시장과 나머지 시장들의 차이점은 크게 상가 임대형과 노점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인수동시장은 시장 겸 쓰레기처리장까지 같이 수용하고 있었기에 건물보다는 노점이 많을 수밖에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만큼이나 아이들 놀이에 최적화 된 장소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쓰레기처리장만 해도 숨바꼭질에는 최적의 장소였는데 당시 쓰레기는 녹색으로 페인트칠을 한 리어카로 수거가 되었었다. 시장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수거가 끝난 리어카는 쓰레기처리장과 시장의 경계를 구분 지어주는 방어선 같은 역할도 했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리어카 속으로도 곧 잘 숨곤 했다. 게다가 쓰레기 처리장은 한 곳이 아니라 총 세 곳이었기 때문에 숨바꼭질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생각해보니 신기하다. 아주 미세한 음식물 쓰레기 냄새에도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는 지금에 비해 당시의 쓰레기장 냄새는 이상하리만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실 기억을 떠올리는 것 보다 그 시절, 불쾌한 냄새에 대한 감정만이라도 떠올라야 하는데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세월이 오래 지나 잊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그런 냄새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뛰어다니며 노는 것이 재밌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인수동 시장에서 노는 것이 가장 즐거웠던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리어카에서 순대를 팔던 할머니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배고픈지도 모르고 하루 종일 놀다보면 꾀죄죄한 몰골이 되기 일쑤였는데 거지같아서 그랬을까? 순대를 팔던 할머니들이 나를 불러 세우는 일이 자주 있었다.

 

 “얘야, 밥은 먹었니?”

 

 “안 먹었는데요.”

 

 “잠깐 이리 오거라.”

 

 할머니는 이내 리어카에서 순대를 꺼내 길게 한 토막 잘라 손에 쥐어 주시며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서 나라의 큰 일꾼이 되거라.”

 

라고 하셨다. 비단 순대를 주시는 할머니뿐 아니라 어렸을 적 나에게 있어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는 항상 이와 같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다. 허나 노느라 배가 고팠던 나에게는 그런 말보다는 내 손에 들려 있는 순대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는 것이 기억이 난다. 얼마나 맛있었던지....

 

 그 날 이후 골목대장인 나는 매번 동네 아이들을 죄다 이끌고 인수동 시장에서
놀 곤 했다. 놀 때마다

 

 ‘오늘도 순대를 먹을 수 있을까?’

 

라는 기대감을 가지기도 했었는데 사실 같이 놀던 아이들 중에 공짜 순대를 먹은 이는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장에서 한참을 놀다 보면 어떤 아이들은 엄마한테 혼날까봐 스스로 일찍 집에 들어가고 또 어떤 아이들은 엄마가 직접 찾으러 오는 바람에 집에 끌려가고, 또 어떤 아이들은 집에 간다는 말도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항상 시장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아이는 나밖에 없었으니깐 말이다. 나는 항상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할머니들이 장사 마무리도 할 겸, 순대를 선뜻 내어주신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조만간 평생을 살아온 내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 그래서 나는 마야 안젤루라는 흑인여성 작가의 명언처럼,


 ‘세상을 위해 좋은 일 하나 남겨라.’

 

라는 말 까지는 아니지만 엇비슷하게나마 내 고향을 위해 무언가를 하나 남기고 싶었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성북구의 옛 ‘정릉’동을 위해 무엇을 남겨야 하나 하고 말이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가장 기뻐할 때가 언제일까?’

 

 반대로,

 

 ‘사람이 가장 서러울 때가 언제일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난 대답을 구했다. 그것은 바로 ‘기억’해 주는 것.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줄 때 기쁘고, 누군가가 나란 존재를 잊어버렸을 때 서러움을 느낀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나는 이제는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는 옛 성북구 ‘정릉’동을 위해 나만큼은 기억하고 있다고,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시 꼭 돌아오겠노라고 되뇌어본다,

 

 기억하기 위해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기 위해서 보잘 것 없는 몇 글자의 추억의 글일지언정 이렇게 나마 글을 남기기로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남기는 것이 있는 만큼 꼭 가지고 가야 하는 것도 생겼다. 그것은 바로 할머니들이 내게 주셨던 따뜻한 마음.

 

 공중전화가 20원, 쌍쌍바와 진라면이 100원이던 시절에 내가 먹었던 길다란 순대 한 토막은 300원짜리. 어떤 날에는 500원 짜리.

 

 할머니들 말씀처럼 나라를 위한 큰 일꾼은 되지 못하였지만 할머니들이 내게 주셨던 비싼 순대만큼이나 값진 할머니들의 마음만큼은 잘 간직하여 나 또한 내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그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고향이 그리운 것은
그 때의 그 곳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추억이 그리운 것은
그 때의 그 시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by - 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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