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릉야책_3호

회고록을 통해본 여성독립운동가의 삶

- 이은숙의 [서간도 시종기]*1)를 중심으로

 

글 김가희


 

<정릉야책> 2호에서 처음으로 다룬 ‘정릉문학’ 이야기의 그 두 번째 주제는 쉽게 정했다. 3.1운동 백주년을 맞아 정릉과 관련 있는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해 말해보면 좋을 것 같았다. 성북과 관련된 인물들의 삶을 주제로 극을 만드는 극단 더늠에서 2017년에 <아나키스트의 아내>라는 뮤지컬을 만들어 이은숙 선생의 삶을 조명한 바 있고, 올 해에는 정정화, 이은숙, 조벽화 세 분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보여준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1>이라는 융복합무용극 공연도 있었다. 따라서 말년에 정릉에 사셨다는 사실 말고 이은숙 선생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도 그 분에 대해서라면 뭔가 쓸 만한 자료가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서간도 시종기 - 우당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회고록』이 한자로 된 옛말에 익숙하지 않은 현대인들도 읽을 수 있게끔 주석을 붙여 2017년에 새로이 출판되었다.


 이 회고록은 출판될 때마다 제목이 바뀌었는데, 이은숙이 처음에 정한 제목은 『서간도 시종기』였다. 1975년 첫 출판 때 출판사의 제안으로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라는 제목을 붙이고 『서간도 시종기』는 부제가 되어 책이 나왔다. 그 후 절판되었다가 1981년에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라는 제목으로 중판되었고, 2017년에 와서 현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첫 출간 때 이은숙이라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서 한 선택이겠지만 제목에서 민족운동가의 아내로 그녀를 소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개인의 다양하고 복잡한 삶의 스펙트럼을 누구누구의 아내로 좁혀놓은 느낌이 들어 아쉽다. 두 번째 책 제목이 왜 그렇게 정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추측할 수 밖에 없는데 슬프고 원통한 여인의 삶을 강조함으로써 읽는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고자 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나온 2017년 판에서 드디어 책은 원래의 자기 제목을 찾았다. 책이 제 이름으로 출간
된 지 한 해가 지난 2018년에 이은숙 선생이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게 된 사실은 독립운동가의 아내라는 위치보다 이은숙 선생의 주체적인 삶에 대한 세상의 주목이 가능하게 된 시대 분위기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2019년인 올 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다양한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그 중에서 그 동안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눈에 띈다. 3.1절을 맞아 국가보훈처가 건국훈장 및 대통령표창 등에 추서한 333명의 애국지사 중 75명이 여성이었고, 독립운동가의 가족으로, 아내로 독립을 위해 애썼지만 그 공로에 대해 사회가 돌아보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아내들 역시 독립운동가로 포함되었다. 그러나 여성독립운동가의 서훈비율은 전체의 2% 남짓하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내인 이은숙(1889~1979)의 서훈 이 2018년에야 이루어진 것을 보면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가 업적이 있는 위인, 개인보다는 단체, 그리고 여성보다는 남성 중심으로 치우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독립운동가의 아내, 딸, 며느리로서 독립운동에 가담한 여성들의 역사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주목받지 못했다. 직접 단체를 만들고 무장투쟁이나 교육문화운동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살아간 수많은 여성들은 직접 농사를 지어 가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남편과 가족을 돌봤으며 집안에 드나드는 독립운동가들의 밥을 지어 먹이고 뒷바라지를 하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함께했다.

 

 이은숙과 더불어 2018년에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의 어머니’로 불린 허은 역시 일제강점기 서로군정서 독판, 임시정부 국무령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인 이상룡의 며느리로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의 아내, 딸, 며느리로서 신흥무관학교와 서로군정서 활동이 가능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공로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여성들의 독립을 위한 지원활동이 독립운동으로 기록되고 인정받는 일이 더 늘어나야 할 것이다. 여성들의 독립 운동 활동을 기억하는 문제는 한 사회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관점을 드러낸다. 여성들의 활동을 포함한 독립운동사야말로 과거를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출발이다.

 

 물론 여성들의 독립운동이 간접적인 지원활동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실제로 3.1 만세운동 때를 보더라도 여성들은 남성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에 발표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상무정신을 가지고 독립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92)*2) 이 선언서에서는 여성들도 ‘무력’과 ‘순국’ 같은 방식으로 독립 투쟁의 실천을 촉구하고 있다. 1930년대 초 평양에서 노동운동으로 순국한 강주룡, 광주학생운동의 영향으로 1930년 1월에 서울의 여학생들이 주도해 ‘여학생 만세 시위’로 불린 서울의 2차 시위를 이끈 허정숙, 1940년 한국광복군이 출범하자 자진 입대한 여성광복군 오광심, 지복영, 오희영에 이
르기까지 우리가 발굴하고 기억해야 할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발굴이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로 기록된 자료의 부족을 들 수 있는데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운동가들의 활동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며 기록으로 남지 못했다. 게다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여성 운동가들이 많아서 편지나 일기 등의 기록을 직접 남긴 경우 또한 부족하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직접 쓴 회고록은 독립운동사에 대한 소중한 역사적 사료가 될 뿐 아니라 여성으로서 경험한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독립운동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갖게 해주는 의미를 지닌다.

 

김현경에 의하면 회고록을 통해 나타난 여성독립가의 삶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다.*3)

 첫 째, 독립투쟁에 직접 참여하였다. 의열투쟁에 뛰어들고 독립전쟁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금하거나 병력을 모집했다. 둘째, 독립운동의 사회적 기반을 구축하였다.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가정을 보살피고 경제와 교육적 측면에서 한인사회의 유지에 힘썼다. 한인사회의 교육과 사교 행사를 주관함으로써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독립운동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것도 여성 독립운동가의 역할이었다. 또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뒷바라지하고 독립운동가와 그의 가족들을 돌보는 것도 이들의 몫이었다. 셋째, 남녀의 사회적 역할이나 성 인식을 보여준다. 가정 경제를 유지하거나 가족을 뒷바라지 하는 것은 여성의 역할이었다.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출신이나 계층의 성격상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모습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이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살아갔던 가정이나 사회에서도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그대로 존속했음을 보여준다. (v)

 

 가족 단위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인 회고록으로는 이은숙의 『서간도 시종기』, 허은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정화의 『장강일기』 등이 있다.

 

 이은숙은 1908년 10월 20일에 상동예배당에서 이회영과 결혼하였다. 재혼이었단 이회영은 42세로 슬하에 3남매가 있었다. 이 결혼은 이은숙의 종조(할아버지 남자형제)인 이관직의 중매로 이루어졌는데 이관직 역시 이회영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근대식 결혼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이은숙은 유교식 사상과 유고적인 여성관이 몸에 밴 인물로 결혼 후 남편을 우러러볼 정도로 존경했다. 신민회의 창립 멤버였던 이회영은 잘 알려져 있듯이 독립운동을 위해 일가 6형제와 함께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은숙의 경우 결혼 이전에는 독립운동과 큰 관련 없이 살다가 결혼으로 인해 독립운동가족의 일원이 된 경우이다. 만주의 지독한 추위에 고생하며 서간도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이은숙은 “귀가부인(존귀한 가문의 부인들)들이 이 같은 고생은 듣지도 못했을 것이거늘, 그러나 여필종부(아내는 남편의 뜻을 쫓아야 한다는 말)의 본의를 지키는 것”(69)이라고 밝힌다. 이은숙은 독립을 향한 남편 이회영의 뜻과 의지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주체적으로 독립운동에 뜻을 같이한다.

 

 모친이 돌아가신 소식을 늦게 전해 듣고 이은숙은 참례도 하고 생활비라도 마련해볼까 하여 국내로 들어오는데, 그 때 이회영 대신 중요 서류를 비밀히 간직하고 들어오게 된다. 국경을 넘으며 수색을 당해 신발 안창에 숨긴 편지를 들켜 이은숙은 신의주 경찰서까지 압송을 당한다. 이회영의 아내라는 것이 알려지자 서장까지 와서 조사를 하게 되는데 서장이 이은숙의 시외삼촌을 아는 사이라 다행히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 때 서장이 “점잖은 양반 부인이 왜 이런 나쁜 서류를 가지고 다니시오?”(135)라고 묻는데 이은숙은 “당신네들에게는 이것이 나쁘다 하지만 우리 혁명 가족에게는 으레 있는 일이지 나쁜 것이 무업니까?”(135)라고 대답한다. 이런 이은숙의 모습은 순종적인 여성의 모습이라기보다 당찬 독립운동가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의 빈궁함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강냉이 밭농사로 3남매와 일꾼, 학생들까지 도합 13명의 식구를 책임져야 해서 둘째 댁에서 보내 준 자루강냉이로 버티다가 결국에는 다섯 째 댁과 합솔을 하기도 한다. 지금 생각하면 어려운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친척이나 지인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신세 지기가 쉽지 않은데 그 당시만 해도 중국에 있다가 아무 것도 없이 한국에 오게 되더라도 친척들이 방을 내 주고 돌봐주는 분위기가 있어서 그나마 살 수 있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독립운동을 하는 동지들도 운명공동체로서 서로 돌보지 않고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생활난이 별반 다르지 않았던 1923년, 그 해의 보리 수확을 기다리는 춘궁기에 이회영이 이을규 씨 형제분과 백정기 씨, 정화암 씨 네 분을 데리고 왔다고 이인숙은 회상한다.

 

 그날부터 먹으며 굶으며 함께 고생하는데, 짜도미(여러 가지 콩을 섞은 밥)라 하는 쌀은 사람이 먹는 곡식을 모두 한데 섞어 파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가장 하층민이 사다 먹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도 수가 좋아야 먹게 되는지라, 사기가 힘들며 그도 없으면 강냉이를 사다가 죽을 멀겋게 쑤어 그걸로 연명하니, 내 식구는 오히려 걱정이 안 되나 노인과 사랑에 계신 선생님들에게 너무도 미안하여 죽을 쑤는 때면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때가 여러 번이더라. 때로는 선생들이 다소간 변통을 하여 나에게 주면서 “선생님 진지는 쌀을 사다 해 드리고 우리는 짜도미밥도 좋으니 그것을 먹겠소” 하시면서 선생님 모시기를 당신네 부모님같이 시봉을 하며 지내는 것이 우당장 사후까지도 여일하시다. (140-41)


 강냉이 죽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나보다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이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고종 때 최고 갑부의 집에 양자로 들어간 이회영의 형제 중 둘째 이석영 선생은 빈궁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고 하니 그 당시의 생활고가 어떠했는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플 뿐이다.

 

 생활비를 마련해 볼 생각으로 혼자서 국경을 넘었지만 일본의 감시가 심해서 돈을 융통하기가 너무 어려웠던 이은숙은 중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가족과 떨어져 지내게 되는데, 그렇게 떨어져 지낸지 6~7년 후에 결국 중국에 있던 남편 이회영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은숙이 쓴 축문의 내용을 보면 이회영의 죽음에 대한 처의 원통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또 처 포태(임신) 4삭에 조선 와서 낳은 아이를 가군이 들으시고 규석이라 이름지어 편지를 처에게 부치실 제, 부자는 천생지친(天生之親)이라 얼마나 보고 싶어 생각하셨겠습니까.

 석아가 7세가 되도록 처가 가지 못하여서 부자가 이내 상면치 못하고 가군이 별세하시게 되어, 석아로 하여금 궁천지통(窮天之痛:하늘에 사무치는 고통이나 설움)을 가슴 속에 품게 했으니, 처의 원통한 눈물이 어찌 마를 수가 있사오리까. (239)

 

 이은숙은 고문으로 남편을 잃은 아픔이 채 사그라들기도 전에 아들 이규창의 옥바라지에 가슴을 또 졸이게 된다. 이규창은 친일파를 처단한 후 체포되어 한국으로 압송되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이규창은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조선거류민회 부회장과 고문을 역임한 바 있는 이용로를 사살하였다.


 해방은 딸이 살고 있던 만주 신경에서 맞이하였지만 돌아오는 길에 이은숙은 딸 현숙을 잃고 만다. 딸을 잃은 아픔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울로 돌아오는 길 역시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북한을 통과해야만 하는데 의용군을 만날 것을 두려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특히 고향을 서울로 하면 포살(잡아 죽임)한다는 말을 듣고 걱정을 하거나 도중에 만난 의용군들이 남한에 가지 말고 자기네 군대에 가입하라고 권유하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그 당시 역사적 사실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점을 새삼 또 느끼며 해방이 되었다고 당연히 자유와 평화가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 또한 새롭게 다가왔다. 회고록에는 해방 후와 전쟁 때까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만 그 많은 이야기를 여기서 다 다루지는 않겠다.
이은숙은 남편과 남편의 형제들, 나아가 그들의 가족 및 독립운동
가들의 역사를 기록해야 할 것에 대해 끊임없이 강조했다고 한다.

 

 결국 이은숙은 자신의 손으로 회고록을 남기는 실천을 통해 기억과 기록의 중요성을 알렸다. 우리에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고 기억해야하는 의무가 있다. 3.1운동 100주년이라 잠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잊지 않고 꾸준히 역사를 발굴하고 새로 써야할 책임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손수 회고록을 남겨 역사를 기록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간 이은숙의 삶에 더 주목할 필 요가 있다.

1) 이은숙. 『서간도 시종기 우당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회고록』. 일조각, 2017.
2) 이준식. 「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의 재인식」. 『내일을 여는 역사』 59, 2015. 86-103.
3) 김현경. 『회고록을 활용한 다원적 관점의 여성 독립 운동 학습』. 한국교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9.

 

 

*이 글의 저작권은 '정릉야책'에 속해 있으며 무단 도용 및 복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