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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야책_3호

대화와 공감

글 허광석

(일산청정한의원 원장)

 

 

 “사랑이란
누군가가 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려는 적극적 의지의 표현이다.”

 

 어떤 책에서 본 이후 개인적으로 울림이 많아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문구다. 소설, 드라마, 영화, 가요에서 많이 나오는 남녀 간의 애정만을 사랑이라고 알고 있던 때에는, 무슨 소리인가 하다가 결 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고 한의원에서 진료를 하면서 점점 더 크게 느끼는 말인 것 같다.

 

 내가 자란 집은 가족 간의 대화가 거의 없었다. 예전 TV 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에서 나오는 ‘대화가 필요해’ 라는 경상도 집안의 식사 풍경이 우리 집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으니.... 대구라는 지역에, 각자 집안의 장남, 장녀인 부모님과, 장남이자 장손인 나, 과묵한 남동생이 우리 가족이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이 다 같이 있을 때 주로 드는 느낌은 먼가 모르게 답답하고, 약간의 긴장감이 항상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나는 TV에서 알콩달콩,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생소했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면서 조금씩 내가 만들고 싶은 가정의 상이 만들어 진 듯하다. 서로 대화를 많이 하고, 서로를 보듬어주는 사랑이 넘치는 가정. 고등학교 때부터 내 목표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두 가지 가 있었다, 첫 번째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두 번째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려면 서로 소통, 즉 말이 잘 통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는데, 나는 일반적인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서로 교감하며 진솔한 대화를 하는 것에는 서툴렀다.

 

 20대 때 내가 생각한 사랑은 통속적인 죽고 못사는 사랑이었다. 내가 접했던 매체에서 남녀 간의 사랑을 그렇게만 그리고 있었으니 당연한 거였지만, 실제로 나의 경험 또한 그만큼 힘들었다고 할 수 있다. 오로지 사랑을 갈구하고, 서로를 옭아매고, 항상 사랑을 확인해야 하는 그것이 사랑이라 굳게 믿고 있었으니.말이다. 그 믿음의 결과로 내가 경험한 것들은 욕망과 저항, 애증 딱 그 정도였던 듯하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몰랐었다.

 그리고 대화가 잘 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는데, 내가 커온 환경은 설명했듯이 대화란 그저 꼭 필요한 말만,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 때 비로소 말하는 딱 그 정도였을 뿐, 수다를 떠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수다 떠는 것이 쓸데없는 말만 많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진료실에서 환자들에게 수다를 많이 떨려고 한다. 편하게 이야기할 상대가 있으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온전히 드러내면서 다 말하기를 권장한다.

 

 진솔한 수다나 대화는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된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저런 상처들을 그냥 가슴에 쌓아놓고, 묵혀놓고, 시간이 지나면 그 기억이, 감정이 옅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참는다. 하지만 그것은 미봉책일 뿐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냄새가 지독한 쓰레기를 눈에 보이지 않게 그냥 신문지로 덮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그 악취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정서적, 의식적인 부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으면, 거기에 대해서 솔직하게 내 마음이 어땠는지를 잘 살펴보고, 그 마음 하나하나를 잘 느끼고 말로 표현을 하면 그 감정들을 다시 경험하며 발산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치유가 된다.

 

 감정, 마음이란 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그저 온전히 다시 경험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배가 고플 때, 밥을 먹어야 해결이 되는 것처럼, 마음, 감정은 그 상황을 충분히 느끼고 경험하면 저절로 사라진다. 화가 나면 화나는 감정을 느껴야 한다. 그것을 나쁜 감정이라고 여기고 의지와 생각으로 막으면 안 된다. 그냥 감정을 경험하면서 흘러가게 하면 저절로 옅어지고 사라진다. 우리가 좋은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유쾌하거나 즐거웠던 감정들은 충분히 경험을 하기 때문에 잘 쌓여있지 않는 것이다.

 

 수업시간이나 어떤 엄격한 상황에서 웃긴 일이 있을 때, 평소보다 더 웃기고 그 감정이 자꾸 떠오르는 것을 경험해 봤을 것이다. 한번 제대로 웃고 나면 크게 웃지 않을 일들이,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을 때 계속 남아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우리가 주로 안 좋은 감정이나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주로 그렇다. 분노, 배신감, 억울함, 슬픔 등.

 

 배가 고플 때, 어떤 일이 생기면 잠시 배고픔을 잊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잠시다. 본질적인 그 배고픔을 채워야 다시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 감정과 마음도 동일하다. 감정적으로 상처가 되는 일이나, 감당하기에 큰 사건들은 마음이 스스로 방어를 해서 충분히 경험을 못하게 막거나, 다른 생각들로 대치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반복되다 보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지 못하고, 내 마음이 어떤지 모르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점점 느끼기보다는 생각이 많아지고 무표정해지고 무감각해진다. 무감각해져서 뉴스와 사회면의 여러 사건들을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은 대화와 공감 그리고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실 가까운 가족과 지인들 사이의 일이 아닌 뉴스나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서 심리적인 상처를 받고 그것이 트라우마로 작용하여 내 삶에 영향을 주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도 수다나 대화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 해소해 나가면 좋지 않을까? 그리고 그 대화와 공감의 능력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정말 중요하고, 그런 능력이야말로 내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자기의 감정을 솔직하게 느끼거나 표현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느낌보다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이 많아지면 이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서 불면증도 오고. 많이들 경험해 봤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면..., 아! 내가 먼가 느끼고 경험해야할 감정이나 마음이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무시하고 있다는 신호임을 알면 된다. 그리고 잠시 최근의 일을 돌이켜보며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눈을 감고 한번 느껴보자,

 

 그런데 감정이나 마음을 느끼는 것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은(대부분은 그렇다, 느낌을 생각으로 대체시키는 것에 익숙해졌고, 마치 생각하는 것이 느끼는 것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냥 빈 종이나 핸드폰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하나씩 적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단지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들을 눈으로 볼 수 있게 적기만 해도 편해진다. 그러다 보면 반복적인 패턴을 발견할 수 있고, 그냥 적으면서 생각들이 줄어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안 되면 밖으로 나가서 주변 경치를 감상하거나 지나가는 사람이나 주위의 사물을 관심 있게 관찰하거나 주의를 전환시킨 다음 다시 시도해보면 도움이 된다.

 

 사람들은 보통 주의 전환을 하고나면 그 힘겨운 감정이나 주제를 다시 보는 것을 꺼리는데, 주의 전환을 해서 맑은 정신으로 내 감정과 마음을 느껴보면 그 전보다 훨씬 편해진다. 그래도 잘 안되면, 편안한 상대를 찾아 대화를 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아!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대화를 하고 마음을 표현하라고 해서, 그 이해관계의 당사자에게 내가 가진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나오는 그대로 상대방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감정의 배설에 지나지 않는다. 당사자와의 대화는 감정적인 격함을 어느 정도 해소한 이후에 하자. ‘내 감정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온전한 내 것이다.’ 내가 실수를 많이 한 부분이라 염려가 되어 하는 말 이다. 나는 내 감정을 내가 책임지지 않고, 솔직하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아주 무책임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경험이 많았다. 지금도 항상 경계하고 노력하는 부분이다. 나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보내서 오염시키지 말자, 그랬을 때는 득보다 실이 많다. 나 혼자서 감당이 안 될 때, 그 때 주변의 안전하고 편안한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도움을 받아 내 감정을 해소시키면 된다.

 

 그냥 충분히 느끼면 해결될 것들이 생각이나 단어로 표현하면 파편화 되어 그 감정과 마음의 부분만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가 딸기 맛이라고 표현은 하지만, 그 맛을 글이나 말로 그대로 전달해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딸기 맛은 먹어봐야만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냥 경험하고 느끼고 표현하면 된다.

 

마음과 감정을 잘 경험하고 느끼지 못하면 흐름이 막히고 몸에 이상 신호들이 생긴다. 대표적인 것이 화병인데, 굳이 병명으로 접근하지 않고, 증상으로만 봐도 많이들 경험할 것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화가 잘 안되고, 어깨가 굳고, 두통이 생기고, 어지럽고, 잠을 잘 못자고,,,, 대부분은 겪어봤을 증상들이다.

 

 소화불량 중에 실제로 원인이 음식에 있는 경우보다는 스트레스일 때가 더 많다. 그럴 때 내가 최근에 신경 쓴 것이 무엇인지 한번 잘 살펴보고, 정말 맘 편한 상대에게 털어놓고 이야기하고 나면 많이 편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소화가 잘되기 전까지
음식은 조심해야 한다.

 

 나는 결혼 후에 아내가 처제랑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랑 내 동생은 1분이면 끝날 이야기를 가지고, 한참 동안을 어찌나 재밌게 이야기를 하는지.... 정말 놀라웠고,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궁금했다. 잘 살펴보니 자기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대화가 두 사람의 일상이었다. 특히 어린이들과 대화를 할 때 쉽게 공감하고 대화를 이끌어 가는 것을 보면 대화와 공감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화하면서 서로에게 공감해 주는 것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인 듯하다. 스트레스도 풀리고 에너지도 생기고. 그러니 우리 공원이나 집이나 스타벅스에서나 어디서든 내 옆에 사람과 차 한 잔하며 이야기 많이 하고 살자.

 

 사랑하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데 머 별거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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