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적을 만났다.
클라라
나는 기적이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어떠한 것 또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내 삶에 기적이 일어난 적도 없었지만
그다지 기적을 바랐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던
유일한 기억은 어린 시절 예방접종 주사를 맞을 때였다. 학교에서 단체로 이루어졌던
예방접종 주사를 맞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던 바로 그 때, 난 그 자리에서 ‘픽~’ 하고
쓰러져서 그순간을 모면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무더운 여름날 학교 전체 조회
시간에 교장선생님의 훈시를 듣느라 전교생이 오와 열을 맞춰 서 있을 때 몸이 약한 학생
한 명 정도는 꼭 ‘픽~’하고 쓰러져 그늘이나 양호실로 옮겨지고는 했었는데 그 상황을
목격할 때면 그 학생이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과 기절을
했다는 사실을 그저 부러워했었던 기억이 있다. 주사 맞을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그 가녀린
학생처럼 단 한 번만이라도 ‘픽~’ 하고 쓰러지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하게 바랐지만 나에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때 이후 나 또한 나에게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어떠한 것,
즉 기적 같은 것은 기대하지도 희망하지도 않게 되었다.
이런 내가 드디어 생애 처음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때는 2019년 여름, 7월말의 어느 날이었다.
장마 기간이라 툭하면 비가 왔기 때문에 학교 열람실의 내 자리엔 우산이 항상 비치되어 있었고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이나 학교에 가서도 수시로 일기예보를 확인하곤 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평일에는 매일 학교를 나갔지만 주말은 주로 집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었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날은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갔다.
아마도 전날인 금요일이나 목요일에 학교를 가지 않아 내 자신이 너무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집을 나서기 전 일기예보를 확인했을 때 오후3시나 4시쯤 소나기가
올 것이라고 했다. 일기예보는 정확했다. 3시와 4시 사이에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시원하게 소나기가
내리는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혼자 식당에 밥을 먹으러가기가 쑥스러워 정확히 7시경에
마무리를 하고 학교를 나섰다. 비온 뒤 공기는 상쾌하고 하늘도 꽤 맑은 편이었다.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학교 후문을 지나갈 때 쯤 물방울 하나가 내 위로 툭 떨어졌다.
어~ 비? 하늘을 보니 구름이 별로 없는 듯하여 ‘설마’하며 계속 걸어가던 중 10여 미터 쯤 갔을 때
또 빗방울이 툭 떨어졌다. 버스정류장에서 잠깐 고민을 했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학교로 돌아가 우산을
가지고 와야 하나? 고민을 하면서도 발걸음은 계속해서 집 쪽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불과 몇 미터를 이동했을까 갑자기 우두둑 쏟아지는 빗줄기에 당황해 내달리기 시작했지만
비를 피할만한 장소는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컨테이너 박스에 바짝 몸을 붙이고 겨우 한 뼘 정도 되는
처마 같지 않은 처마 아래 몸을 피해보았지만 바람과 함께 거세게 몰아치는 빗줄기로부터 나를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근처에 비를 피할만한 장소를 떠올려보면서 빗속을 질주하다 근처 산책로로 올라가는 곳에 위치한
정자로 간신히 몸을 피했다. 얇은 재질의 천으로 된 옷은 그사이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어 나를 민망하게 만들었지만
다행히도 줄무늬와 꽃무늬가 있어 내 몸이 적나라하게 비치는 것을 방지해 주었다.
나뿐만 아니라 길을 가던 행인, 산책을 갔던 사람들, 둘레길 등산을 갔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정자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우리는 모두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비는 그치지를 않았고
잠시 빗줄기가 가늘어지자 우산을 가진 사람이든 가지지 않은 사람이든 떠나가기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하염없이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비를 조금 맞더라도 가는 것이 현명한 판단인 것 같이 보였다.
내 몸 하나라면 나도 비를 맞고 집에 가서 씻으면 그만이었겠지만 에코백에 들어있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걱정되어
선뜻 길을 나설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어느덧 정자 밑에는 나만 홀로 남겨져있었다.
비는 멈출 낌새를 보이지 않았고 너무나 난감하고 막막한 기분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홀로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려야만 할 것인가’, ‘도대체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오늘 안으로 집에는 갈수 있을 것인가’ ….
애타는 마음을 안고 나는 하늘을 또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때 내 눈앞에 기적이 나타났다.
황망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올려다 본 내 눈앞에 기적처럼 우산이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정자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을 잇는 가로로 놓인 대들보 위 조그만 틈새 사이에 기다란 장우산이 고이 접혀
얹혀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우산을 내려서 쓰고 집으로 걸어가면서 너무나 감사한 마음과 함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이상하고도 신기한 느낌에 젖어 이런 것이 기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어떤 일, 초자연적인 일, 과학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일 등의 믿을 수 없는 현상들만이
기적이라고 생각해 왔었지만 이 날의 경험으로 기적이란 우리 주변의 사사로운 것으로부터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 절실한 무엇인가를 꼭 필요한 순간에 얻을 수 있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만난 이런 기적은 우산을 그곳에 가져다 놓은 누군가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네
인생에서 만들어지는 기적은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의 의미 있는 행동이든 아무런 의미
없이 행한 행동이든 인간의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 기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그 우산의 원래 주인은 우산이 낡고 오래되어 그곳에 내다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우산은 재활용이 되지 않아
버리기가 쉬운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곳에 몰래 가져다 버렸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 우산 주인의 애초 행위가
불순했는지 건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행위가 나에게 기적을 선사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이처럼 누군가의 한 순간의 행위가 나에게 기적을 가져다주었듯이 내가 한 소소한 어떤 행위가 어떤 누군가에게 기적을
가져다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